고우영 서유기 - 나의 한글선생

어느 해인지 기억은 못하지만, 아무튼 제가 무척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대략 4~5살 정도로 봅니다.) 당시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앞집 아저씨는 인근 중학교선생님이셨지요. 어느날 집에 고우영 서유기 한 권(표지도 떨어진)이 들어왔는데, 그게 학교에서 몰래 만화책보다 걸려서 압수된 것을 앞집 꼬맹이들 보라고 빌려준 것이었지요. 사실은 형님보라고 한 것이었을텐데 저도 매우 열심히 보았습니다. 

뭐 그런데 당시 저는 너무 어려서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랐지요. 그럼 저는 대체 이 서유기를 어떻게 본 것인가...하면 형님(역시 미취학아동)이 어린 아우를 위해 만화책 읽어주기를 해준 덕으로 본 것입니다. 그 때 본 것은 딱 한 권이었습니다. 새로 나온 세 권짜리로는 1권 후반부과 2권 중반까지의 분량이 그 한 권이었네요. 손오공이 바위에서 삼장을 만나 구출되는 것부터 해서 호랑이가죽으로 옷 지어입는 이야기부터 저팔계를 만나는 것까지요. 뒷부분에 사오정이 있는 강가에 이르기는 하지만 거기서 끝나버렸지요. 그 한 권이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형님보고 읽어달라고 재촉했습니다. 처음에는 형님본인도 재밌고, 아우를 돌보는 입장에서 좋았을 것입니다만...한 권 밖에 되질 않으니 싫증날 법도 했습니다. <요츠바랑>에도 이런 장면이 나오지요. 돌고래 DVD 보고 또 보고...저도 보고 또 보고하는 '어린것'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지요. (먼 산)

그러다가 저는 어느새 혼자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두둥) 

물론 저는 한글을 따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뭐 별거 있나요? 맥아더는 상대성이론을 이해못해서 그냥 외웠다는데 뭐...고작 서유기 1권 따위;  그냥 외워버리면 되는거죠 ~_~ 

형님에게 매번 같은 책을 읽어달라고 귀찮게 하다보니 형님이 눈치를 줬을거고 그 눈치를 간파한 아우가 생존본능으로 외워버렸던 것인지....쾌락(?)과 지식에 대한 학구적 열망으로 서유기 암기의 위업을 달성했던 것인지...이도저도 아니고 형님의 한글교수법에 의해 안되면 되게하라는 전투적 신념으로 외워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형님도 좋았을 것입니다. 밖에서 동네친구들과 어울리려고 하면 동생따위 그냥 짐덩어리잖아요 -ㅠ-?

그리하여 말도 잘 못하는 어린애가 방바닥에 혼자 엎드려서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입으로 소리내며 읽고(?) 있는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만약 그게 무슨 경전같은 거였다면, 암송회에 불려나가 신동소리 좀 들었겠지요 ~_~; 

이것은 실로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아버지께서 아들놈이 진짜 한글을 깨쳤는가 싶어서 글자을 짚어가면서 이게 뭐냐고 읽어보라고 '시험'을 보셨는데, 그 시험에 통과했거든요. 솔직히 그 때 제가 진짜 한글을 읽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서유기에 있는 형상정보와 함께 음성정보가 바로 나왔던 건 사실이거든요. 여의봉이 늘어나는 '늘늘늘'과 줄어드는 '몽몽몽'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ㅠ-; 

물론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해가 안되는 단어들은 암기(;)가 어려웠을테니 그런 부분은 읽지 못했것입니다. 주로 쉬운 대화와 의성어를 중심으로 외우기 시작했고, 그 기억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어쨌든 이때부터 글읽는 법을 부모님으로부터 직접 전수받게 되었습니다. ㄱ, ㄴ, ㄷ, ㄹ 같은 것은 나중에 교육기관을 통해 알게 되었지요. 어린이용 한글교육도서를 통해 글을 배운게 아니라서 체계적인 학습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지만, 읽는 법은 일찌감치 익히게 되었지요. 

진짜 저 때는 낫 놓고 기역자 모를 때였습니다. 근데 뭐 어때요. 낫이라고 써진 글자나 'ㄱ'이 조합된 글자를 읽을 줄 알면 되는 거죠. 'ㄱ'이 기역자인지 알게 뭡니까; 나중에 진짜 한글을 배우려고 하니까 그건 되려 외우기 어렵더군요. 도통 재미가 있어야지 말이죠; 이것저것 따지고보면, 형님이 가르쳐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글교사는 형님, 교과서는 서유기인 셈이죠. (텍스트 제공자는 선생님인지; 압수당한 중학생인지 모호하지만;) 하지만 재미있는 교과서였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유기를 통해 한글을 배우고 나서부터 가게 간판을 읽어보라는 어른들의 요구에 부응해주는 미취학아동의 위엄을 드러내고 다녔죠. 히히;

나이먹고 나서 우연히 서유기를 읽게 되었는데, 당연하게도 어린 시절에 읽었던 부분은 장면 하나 하나가 새록새록 기억나면서 무척 재밌게 읽었습니다. 물론 고우영 서유기 자체가 재밌기도 합니다만, 제가 어린 시절에 읽지않은 부분은 낯설어서 재미가 덜했습니다. 다시 봐도 앞 뒤 부분은 좀 별로더라고요. 어린 시절에 앞 뒤 부분이 아닌 중간 부분을 보게 된 것이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뒷 부분은 상당히 성인향인데다, 읽는 재미도 떨어지니 반복해서 읽었을 것 같지가 않거든요. 이상하게 서유기를 다시 보면서도 어렸을 적에 읽은 부분을 계속 반복해서 보게 되더라고요. 보면서도 입이 근질근질하고요. 히히;


*  이 자리를 빌어 故 고우영 화백의 영면을 빕니다. 

*  어렸을 적에 읽었던 서유기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면 좋겠지만, 표지도 없던 그 서유기는 몇 달 후에 원 주인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압수품이었으니 응당 돌려줘야지요.
by MessageOnly | 2010/06/14 17:41 | ■ 다른게 또 뭐있나..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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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10/06/14 20:25
그러고보니 저의 어릴적 중국사 선생님은 고우영 화백의 '십팔사략'시리즈였었죠. ㅎㅎ 한분야의 시작을 고화백의 작품에서 자극받은 다른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저 역시 고 고우영 화백의 영면을 빕니다.
Commented by MessageOnly at 2010/06/15 16:34
십팔사략도 무척 재미있지요. 이건 좀 나중에 봤습니다. 삼국지는 대략 10년전에 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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