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베트남
2012/03/16   재주는 베트남이 넘고 돈은 태국이 법니다. [6]
2011/12/29   원조 베트남 한류스타 이수광 [30]
2011/09/23   오리온 초코파이 파이로드 [6]
2010/08/26   살아있는 전설, 보응우옌지압 100세 생일 [15]
재주는 베트남이 넘고 돈은 태국이 법니다.
< 베트남식 쌀국수 장국 >

베트남 쌀국수로 잘 알려져 있죠. 

근데 그 쌀국수의 시판용 장국은

'태국산'



베트남엔 장국만드는 공장이 없나?

그럼 쌀국수도?

넵. 쌀국수도 태국산!


'베트남 쌀국수'라고 해먹고 있는데, 

국수도, 국물도 전부 태국산이라니...-ㅠ-;;



물론 태국에서도 쌀국수 해먹죠. 
그래서 '호환'되는거지만....

'베트남 쌀국수'라고 홍보가 되었어도
 정작 돈 버는 건 태국이었군요.

....베트남에겐 참 안 좋을 이야기 -_-;;

반대로 생각하면 태국도 태국나름대로 쌀국수 종주감이 있을테죠...;






...이거보고나서 검색해보니 태국산 재료가 베트남산 재료들보다 훨씬 싸네요. 

베트남 재료는 가격도 비싼데다, 
포장까지도 좀 구식이라 싸구려 느낌까지도 나니;
소비자들에게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을 법하긴 합니다. 


by MessageOnly | 2012/03/16 17:28 | ■ 먹는게 남는 것 | 트랙백 | 덧글(6)
원조 베트남 한류스타 이수광

앨런비쨩☆의 베트남사 (23) 1차 남북전쟁.

이 때문에라도 레조는 명에 사신을 보내 책봉받으려고는 했으나, 명은 츤! 츤! 츤! 뭐 그나마 성과(?)라면 1596년 베트남 사신 풍 칵 코안(Phung Khac Khoan, 馮克寬), 즉 풍극관과 조선의 이수광이 만나서 필담을 나누었다는 것이려나? 


앨런비님의 베트남사 연재 중에 이 이야기가 눈에 띄어 써봅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이라는 저작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죠. 
이 이수광은 한-베 관계사에 꽤나 재밌는 기록을 남겼는데..
내용인 즉슨...이렇습니다. 


이수광은 본관이 전주로 조선왕조의 왕족인 '전주 이씨' 즉, 종친입니다. 출신성분(?)도 좋은데다 실력도 좋았으니 벼슬길에 나선 후로도 잘 나갔지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전인 1590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연경(북경)에 다녀왔는데, 선조가 대뜸 이수광에게 안남국(베트남) 사신의 복식, 제도, 풍속 등에 물어보았으나 아는게 없는 터라 답변을 못했습니다. <지봉유설>같은 저작으로 미루어보아 스스로가 본인의 지식에 자부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고, 주변에도 그런 평판이 있어 선조가 사신으로 다녀온 이수광에게 물어본게 아닌가 싶은데요. 이 때 이수광이 답변을 잘 하지 못했던 것이 좀 맺혔던가 봅니다. 

그로부터 7년후, 그러니까 1597년. 임진년에 왜적이 침탈해와 조선이 피폐해지고 정유년에 재침해와 정세가 불안할 적에 이수광은 다시 명나라 사신으로 연경(북경)에 출장을 가게 됩니다. 찬스가 온거죠. 거기다가 명나라에서 외국사신들을 모아다가 숙소를 배정해주었는데, 뜻밖에도 안남국(베트남)사신단 하고 같은 숙소를 잡아줍니다. 거기다 체류일은 50일. 대박난거죠. 지금처럼 외국에 대사관을 두고 외교관이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어쩌다가 사신으로 간다고 해도 안남국 사신을 만난다는 보장이 없는데, 50일 장기체류에 같은 숙소로 배정받은 것이니까, 이전에 선조로부터 받았던 부담을 해소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된 것입니다. 

< 풍극관 위키백과 >

거기서 만난 사람이 위에서 언급된 '풍극관'.

풍극관은 안남국(베트남)의 사신으로 막(莫)씨에게 당했던 레(黎, 여)조가 다시 발흥하여 막씨 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 위한 사신이었습니다. 이수광의 묘사는 이렇습니다. '그는 작년 7월에 안남을 떠나 올해 8월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 후로도 숙소인 옥하관에 5개월이나 머물렀는데 사신의 성명은 풍극관이었다. 호는 의재(毅齋)이고 당시 나이는 70살이 넘었는데 겉모습이 매우 괴이하였다. 그는 이를 검게하고, 머리카락을 풀고, 넓은 소매의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치포로서 중같이 머리를 두르고 그 나머지의 절반을 뒤로 내렸다. 또 조회때만은 머리카락을 땋아서 건모같은 것을 쓰고, 복식을 갖춰입고 예궐하는 것이나 돌아와서는 귀찮은 듯이 곧장 벗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를 따라온 수행원들은 대부분 짧은 옷에 맨발로, 겨울이라고 하지만 고말이 없었다. 그리고 침상을 사용하오 음식을 하는 것은 중국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으나 약간 불결하였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어느것이나 무늬가 없었다. 그들의 인상을 말하며 얼굴이 짧고 눈이 우묵하고 성질은 온순하였다. 그리고 검을 쓰는 것도 좋아하나 그 방법이 다른데 좀처럼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필담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 한자를 하는 사람은 얼마간 있었는데, 중국어를 하는 자는 한 사람 밖에 없고 그 나라의 한자는 자획이 달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문체가 어떠한지 보려고 시험삼아 장구를 만들어 보내었더니 금방 사신이 답변을 하였다. 그래서 여러차례 필담을 나누게 되었다.'

시로 화답하면서 서른넷의 젊은 조선국 사신과 일흔 노년의 안남국 사신의 기묘한 우정이 피어나는데...칠십노인의 반밖에 안된 젊은이에게 '대수필(大手筆)'라고 추켜세우질 않나 백선향, 지향 등 안남특산의 선물로 보내오고, 이수광은 소지하고 있던 조선의 필묵을 답례로 줍니다. 그리고 풍극관은 본인이 가지고 있던 '만수경하시집(萬壽慶賀詩集)'의 서문을 이수광 더러 써달라고 요청하니 이수광이 몇 번 사양하다가 간청에 못 이겨 서문(安南使臣萬壽慶賀詩集序, 안남사신만수성절경하시집서)을 써주는 등 오십여일동안 우의를 쌓게 되었고.

그런 이후 이수광은 다시 조선으로, 풍극관은 다시 안남으로 귀국하게 되는데....

<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도진의홍씨 , 출처: 뇌세척 >

정유년 왜침으로 사츠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으로 건너와 진주성을 함락하고 경남 일대를 누비며 조선인 포로를 잡았는데, 스무살의 선비 '조완벽'도 거기 끼어있었습니다. 다른 수 만의 조선인 포로들과 함게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간 조완벽은 다시 교토의 상인에게 팔려갑니다. 

< 스미노쿠라 료이 角倉了以 >

이 교토의 상인은 당대 일본의 거상으로 주요 불교사찰 건축사업 및 '교토 운하'등 거대 토목사업에 금융업까지 통달한 거대 재벌로 성장한 '스미노쿠라 료이'였습니다. 그는 해외 비지니스에도 발을 뻗히고자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문실력이토익점수가 높은 인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해외 무역에 뛰어든 스미노쿠라 료이는 비율빈(필리핀), 안남(베트남)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그렇게 조선의 선비(士) 조완벽은 상인(商)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완벽은 1604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안남국을 방문하게 되고,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 거기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어느날, 안남국(베트남)의 지방장관 정초(鄭剿)가 고관들을 초대한 자리에 조완벽도 초대합니다. 다들 조완벽이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후하게 대접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포로가 된 연유를 묻고, 왜란이 일어난 사실이 안다면서 동정해줍니다. 

그러다가 책 한 권을 꺼내면서 '이 책은 귀국의 이지봉(이수광)이 쓴 시인데, 이 시를 준 사신은 당신과 같은 고려인이니까 물론 알겠지요?' 라고 묻습니다. 이에 조완벽이 답하길,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포로가 되어 이수광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모릅니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그곳에 모인 안남국 사람들이 그럴리 없다(나....나의 조선은 그러치않아!)며 이를 의아하게 여기면서 탄식한 후...조완벽에게 책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한류드라마 열풍일적에 한국인이 베트남에 방문했는데, 뭇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혹시 이영애 알아요?' '장동건 알아요?' 라면서 친근하게 대해주고 밥까지 사주는 셈. 그런데 여기다 대고, '저기; 저는 드라마 방영할때 일본에서 유학하느라  못 봤는데요 =ㅅ=;' 뭐 이런식으로 이야기해서 베트남사람들 실망시키기;;

조완벽이 그 책을 살펴보니 고금의 명시 수백편이 실려있는데, 그 책 첫머리에 조선국 사신 이수광의 시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시는 모두 붉은 먹으로 비점(批點, 시가 잘되었다고 하는 표시)이 찍여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안남국 고관들이 칭찬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부분은 이렇습니다. 

山出異形饒象骨 (산은 이상한 형상으로 솟았으니 코끼리 뼈가 넉넉하고)
地蒸靈氣産龍香 (땅에선 신령한 기운이 피어오르니 용향을 생산하네)

실제로 안남국에 상산(象山)이 있는데, 조선선비가 이를 어찌 알고 지었는가 하면서 정말 절묘하도다 라면서 찬탄했다는 거죠.

조완벽이 이수광을 잘 알지 못함을 알게되었음에도 며칠 후 다시 초대하여 주연을 벌여 대접했다고 하니 조완벽이 이수광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지요. 안남국사람들은 그런 조완벽에게 '조선은 예의지국이므로 우리나라와 같은 나라'라며 위로합니다. 

당시 조완벽이 방문 곳은 교지(하노이) 근처 해안인데, 안남국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고 국자감 등을 설치하고 유교경전을 교육하는 유교국가였습니다. 당연히 공식문자도 한자였으니 조완벽의 필담이 통하는 것이었죠. 

그러고 나서 새로이 책을 꺼내 보여주며 '이 책은 귀국의 재상 이지봉이 쓴 책인데, 우리나라 유생들은 모두 외우고 있으니 당신도 보시오' 라고 건내주니 조완벽은 안남현지 비니지스 와중에 짬을 내어 시 몇 편을 베껴서 적었답니다. 그러고나서 학교에 유생들을 만나보니 정말로 유생들이 그 책을 지니고 암송하고 다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K-POP, 베트남 강타) 조완벽은 같은 조선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이수광의 문명(文名)을 멀리 떨어진 안남에서 알게 된 것이었죠. 

< 안토니오 꼬레아, 루벤스 >

그렇게 해외영업직으로 떠돌던 그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609년(임진왜란 종식 10년째)에 조선에서 '쇄환사'를 일본에 보낸 것이었죠. 여우길을 정사로 한 쇄환사 일행은 소문을 듣고 온 조완벽을 만났고, 조완벽이 현지사정에 밝음을 알고 쇄환업무를 돕도록 합니다. 그래서 쇄환사 일행은 조선인 포로 1418명을 데리고 귀국하게 되는데, 여기에 조완벽이 끼어있었지요. 

그래설라무네 천신만고끝에 고향땅을 밟은 조완벽이 그동안 겪은 생활을 줄줄 읊다보니 거기에서 '안남국에 떨친 이수광의 문명'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아 그걸 또 김윤안이라는 사람이 듣고 보니 정말 신통하기 짝이 없는 터라. 대뜸 한양길에 올라 이수광에 이 이야기를 전해주니, 이수광이가 또 대경. 그리하야 이수광이 스스로 이 이야기를 정리하여 본인의 저작인 <지봉유설>에 깨알같은 자기자랑질을 담게 된 것이었습니다그려.  

당대 조선에서도 꽤나 떠들썩하게 화제가 된 모양인지 조선왕조실록에도 해당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조 19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2월 26일(임자) 3번째기사 
이조 판서 이수광의 졸기

이조 판서 이수광(李睟光)이 졸하였다.
수광의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인데, 약관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다. 사람들의 말이 “교유(交遊)를 일삼지 않고 전랑(銓郞)이 된 사람은 수광뿐이다.”고 하였다. 오랫동안 사액(詞掖)638) 에 있어 많은 사명(辭命)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중국에 사신갔을 때,안남(安南)·유구(琉球)·섬라(暹羅)의 사신들이 모두 그의 시문을 구해 보고 그 시를 자기들 나라에 유포시키기까지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자가 상선을 따라 교지(交趾)에 갔었는데, 교지인이 그의 시를 내 보이면서 “그대는 당신 나라 사람인 이지봉이란 이를 아는가?”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도 존중을 받았다.

머나먼 정글안남의 유생들 입장에서는 머나먼 조선의 선비가 안남의 지형에 대해 시로 읊은 걸을 두고 놀라워하고 칭송한 것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저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정을 받을 정도니 그게더 놀랍죠. 이야기가 퍼지자 조선에서의 이수광의 문명(文名)도 크게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좀 안 뜨던 연예인이 일본에서 한류스타라고 뜨면서 한국에서 재평가받는 현상 -_-;)

* 문제의 시구를 이수광이 훗날 상고하여 '자치통감강목에 안남 코끼리가 나는 곳이 상산, 양비외전에 교지에 서룡뇌향을 올리니 늙은 나무의 옹이에서 생기는 선잠향과 같다고 되어있다고 하면서 이는 실로 우연히 맞은 것이었다'라고 하는데....모양새가 은근히 자기가 전부터 알고 있었음을 과시하는 거 같습니다. 히히;

애초에 안남유생들은 이수광에 대해 찬탄하고 있었으니 연경에서 사신들끼리 만나다보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었기도 하지만, 그게 또 이런 기막힌 인생역정의 스토리가 들어있어서 더 기기막히죠.  200년 후 조선 사신 서호수와 안남국 사신 반휘익이 이를 두고 '천고의 기이한 만남'이라고 서로 감탄하면서 문화교류를 통해 양국의 우의를 다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침략, 침략, 침략, 침략해오는 제국주의자들로 인해 양국은 일본,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불우한 역사를 동시에 겪게 됩니다. 이리하여 한-베 교류는 완전히 끊어지게 되고, 급기야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쟁의 참화로 양국의 의가 크게 상하게 되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 베트남에서 '한류'가 크게 흥하여 한-베 관계가 좋아지려하고 있으니 양국의 만남은 문화교류를 통해야만 풀어지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네요.  이수광과 풍극관의 만남 그리고 조완벽이 안남에서 받은 후의에 못지 않은 융성한 교류를 위해 우리모두 관심을 갖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을 배우고 가까이하는 풍토가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by MessageOnly | 2011/12/29 14:56 | ■ 다른게 또 뭐있나.. | 트랙백 | 핑백(2) | 덧글(30)
오리온 초코파이 파이로드



오리온의 2분짜리 대작 CF입니다. 

이거 요즘 TV에서 많이 나오죠. 



다큐같은 영상이 흐르며, 

하정우의 나래이션이 진지함을 더합니다. 



...그래서 막판이 임팩트가 있죠 (...)
보면서 눈물날뻔했는데..ㅠㅠ




오리온 초코파이의 수출역사와 현지화작업(기후, 종교문제 등)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것도 재밌는데,
'취존중'의 정신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이거 따로 편집하면 '취존중'을 위한 짤이 탄생할지도;;;



헌데...광고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이게 포장도 이렇게 되었군요.

러시아

나는 영하 40도의 추위가 두렵지 않습니다.

베트남

나는 열대의 태양이 두렵지 않습니다.

미국

...은 좀 뜬금없다는 느낌..



아무튼




군대편(?) 까지 나왔으니 초코파이에 각 군 마크를 프린트하도록 합시다!

국방부 마크를 기본으로 해가지고
육-해-공군-해병대 마크로 쫙.

이거 아주 좋겠네요. 

군납아닌 군납품.
by MessageOnly | 2011/09/23 22:28 | ■ 먹는게 남는 것 | 트랙백 | 덧글(6)
살아있는 전설, 보응우옌지압 100세 생일

디엔비엔푸전투 영웅 지압 장군 100세 생일


< 이랬던 젊은이가... >

오른쪽이 유명한 호지명씨, 왼쪽이 주인공 무원갑씨입니다.


 < 100세 생일을 맞이했네요 >

사진은 100세 생일축하연에서 응엔 떵 중 총리와 환담을 하는 모습입니다.


저 개인적으론 잊을만하면 가끔씩 뉴스로 나와서 사람 놀래키는 양반입니다.

'이 사람 지금도 살아있어?!' (이런식)



< 군인겸 표지모델, 1972 >

보 응우옌 지압씨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트남 군인이죠.

본래직업은 교사로 정규군사교육을 받지않은채
 해방전선에 뛰어들어 반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몸 바친 불굴의 인물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한 뉴스기사에도 그의 일생이 소개되어 있으니 보시면 될 것입니다.)

프랑스와 싸우기 시작한 것이..
그 다음에는 항일투사가 되었다가,
또다시 들어온 프랑스와 결판을 내고,
미국과도 겨루는..
반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그 파란만장한 인생자체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사람인데,
눈부신 승리의 위업까지 이뤄냈으니 
실로 살아있는 전설로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국가원로지요.


< 관련없는 이미지 >

가장 유명한 전투가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낸 디엔비엔푸 전투입니다.

디엔비엔푸는 구릉지대에 위치한 곳으로 비행기를 통해 물자보급이 가능할 정도로 험한 곳이었는데,
프랑스군의 목표는 베트민군의 기동차단에 있었습니다. 
(단일체의 요새가 아니고 여러개의 진지로 구성된 진지군.)

프랑스군은 화력과 항공세력이 앞서기 때문에
공격과 방어에 유리할 걸로 판단했던 것인데...

베트민군은 인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지요.
짙은 정글을 이용해 은밀히 기동하여 디엔비엔푸 요새보다 더 높은 주변 고지를 점령하고, 
화포를 부품별로 분리해서 고지에서 재조립하여 포진지를 구축합니다.
항공기가 없는 탓도 컸지만, 이 쪽이 은밀하게 포진지를 구축하기에도 좋았지요.
수레와 자전거(2만대 동원)로 물자를 날라 포위망을 완성했습니다. 
완전 인간승리;;

보응우옌지압 장군의 지휘아래 포위망을 완성한 베트민군은
프랑스군 포병진지와 활주로에 포격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외곽에 위치한 방어진지는 베트민군에 의해 점령되고 포위망은 점점더 좁혀들었지요.

사방이 포위되서 활로를 뚫을 수 도 없고, 
믿었던 항공기는 활주로가 두들겨 맞고 있으니 내릴 수 도 없어서 낙하산으로 보급하는게 고작이었는데,
우기까지접어들어 강을 끼고 있던 프랑스군의 방어진지는 물에 잠기기까지 합니다.
(애초에 우기전에 철수할 것으로 계획하고 배치한 것부터가 패인으로 작용)

프랑스군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항복하고 맙니다.
프랑스군 전사상자에 비해 베트민군 전사상자가 더 많았지만,
이 결정적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게 되었지요. 

디엔비엔푸에서 싸운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이 얕봐도 충분할 만큼 구식군대였습니다.
무선통신기 따윈 없어서 인편으로 통신하고, 항공이나 기갑세력은 극히 부족했습니다.
여러면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중국의 마오쩌둥이 공산혁명을 위해 군사원조를 제의하기도 했죠.
하지만 보응우옌지압 장군은 중국의 이런 원조를 '또다른 외세'로 보았고 거절했습니다.
같은 빨갱이라도 중국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본거죠.
역사적으로도 중국은 믿을 놈들이 못되었고..실제로 1979년에 인민해방군이 국경을 넘어옵니다.
(중국은 '혼쭐을 내줬으니 이만 돌아감'이라고 했지만, 인민훼방꾼 2만5천명 전사 -ㅠ-;)

작년에도 베트남내의 친중무드를 경계하는 말을 꺼내서 화제가 되었었죠;
(그 때도 '이 사람 아직도 안 죽었어?!' 했지요;)

이렇게 베트남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뒤 이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월남전)에서도 미국과 겨뤄 승리합니다.

올챙이적 생각안하고 주변국을 상대로 깡패짓하는 걸 보면 썩 좋게 볼 수만도 없습니다만..

어쨌든 조국해방을 위해 싸운 애국적 군인으로
비록 빨갱이군단의 수괴이고 우리와는 전쟁의 악연이 있지만, 
존경할만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투쟁노선뿐만 아니라 청렴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죠.

부인도 무척 함께 장수하며 화목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남편에 비해 매우 젊은 부인입니다. 거의 20살 정도 차이날겁니다. 
두 번째 부인인데, 첫 부인은 젊었을 때 사별했지요. 
첫번째 부인은 처제와 함께 프랑스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했지요. 
(처제는 교수형.)

1911년 8월 25일생이지만, 베트남에서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나이를 세나봅니다.
그래서 100세 생일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번째, ~회 생일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긴하지만..)
서구쪽에서의 뉴스보도는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베트남쪽뉴스에서는 전부 100세로 나오네요.

사실 100세 정도의 장수노인이라면 그 자체만으로 존경받을 만 하죠.

100세 생신을 축하합니다!

< 화이팅! >
by MessageOnly | 2010/08/26 00:25 | ■ 출처는 모르지만.. | 트랙백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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